보통 한해를 마감지을 때 "다사다난 했던 해"라고 많이 표현을 합니다. 금년도는 성탄절을 앞둔 시점에서 이사를 해서
그런지, 그러한 표현이 저한테 잘 어울리는 같군요. 호주에서는 집을 팔 때 두가지의 방법으로 팔 수 있습니다. 가격을 정해놓고 파는 For
Sale, 아니면, 몇주간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시간을 가진 후 경매에 부치는For Auction으로 팔 수 있습니다. 저희 집은 후자의 방법인
경매에 부쳐서 팔았습니다. 11월 10일에 경매에 부쳐져서 저희집을 관심 깊게 3-4번 정도 방문한 인도 가정에 팔렸습니다.
이사
날짜는 12월 20일로 확정 지어졌고, 이삿짐 센터를 불러서 우리 짐을 옮기는 가격을 물어보니 호주돈으로 약 1,000불 가량이라고 하더군요.
9년전에 이사했을 때는 약 400불 들어서 했는데, 그만큼 살림이 늘었다는 뜻이겠죠. 이삿짐 센터에서 저희들이 짐 정리할 수 있게 빈 상자
수십개를 놓고 가서 몇주간 저희집은 무슨 창고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빈 상자들이 집에 놓인 후 부터 저희 집 식구는 9년동안 살던
정든 집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 좀 게으름이 많은 편이라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리하지 않았죠. 하긴, 한국 떠나는 전날에
1년간 살던 집안 살림과 짐 정리하느라 하룻밤을 꼬박 새웠던 저였으니까요... 이사가는 날이 월요일이라서 미리 직장에 연가를 신청하고 주말 내내
제 짐 정리를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써오던 제 책상이 있었습니다. 호주에 건너 올 때도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온
책상이였습니다. 횟수로는 약 13년을 저와 함께 해 온 셈이죠. 새로 이사가는 집에 제가 쓸 서재방안에 책상이 있다는 이유로 그 책상을 잘 아는
집에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책상을 제일 먼저 정리하였는데, 나중에 텅빈 책상을 바라보니 생명체가 없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더군요. 한국과 호주에서 보낸 학창 시절의 많은 시간을 그 책상 앞에서 보냈었고, 초조하게 시험 공부하던 때, 대학교 들어간 이후로 많이
했던 밤샘 공부하던 악몽(?)같은 기억, 첫사랑의 아픔 후 그 책상 앞에서 시를 흉내 낸 글들 쓴답시고 앉아있던 일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들 같았는데 마치 흑백 사진들로 가득찬 부모님의 앨범 보는듯한 기분으로 그 기억들이 제 머릿속을 지나갔습니다. 아쉬움의 한숨 푹 쉬고 나서
책상을 한번 쓰다듬고 마치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듯 툭 치면서 "수고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몇시간 후, 집을 잠시 비웠을 때, 제 책상의 새
주인될 집에서 물건을 싣고 가서 나중에 집에 오니 방 한켠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책상과의 이별,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은
이사하는 날의 서곡에 불과하였습니다. 저희 작은 방을 정리하는 데도 짐이 커다란 상자로 6개정도 나오더군요.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많은 것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참 신기한 물건들이 짐 정리하면서 나오더군요. 아주 어렸을 적에 소중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간직했던 것들, 미처 앨범에 넣지
못한 옛사진들, 초등학교 때 만들은 것 같은 게임 보드, 중고등학교 시절 때 쓰던 연습장 기타 등등... 어떤 물건들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지만, 어떤 물건들은 버리기가 무척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버리기엔 아쉬운 몇몇 물건들을 한동안 옆의 한켠에다가 쌓아 두다가 몇
시간이 지난 후 그제서야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릴적의 꿈이 자라면서 바뀌듯이, 사람의 가치관도, 세상에서 무서워하는 것들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조금씩 - 어떨때는 많이 - 바뀌는 것 같습니다. 분명 그 시절에는 소중하게 생각해서 보관한 물건들이, 몇년이 지나서는
과감히 버릴 수 있는 물건들로 전락해 버리고, 어떤 물건들은 아쉼움이 많이 남지만 버려야 하고, 어떤 물건들은 끝까지 잡아보려고 옆에 두지만
불과 몇시간이 지난 후 결국은 버리고야 말고...
어떠한 물건들은 상자속에 조심스레 넣고, 어떠한 물건들은 바로 옆의 커다라 까만
비닐 봉지에 버려지는 것을 보며, 전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혹 세월이 지나서 지금 내가 버리는 것들을 다시 찾게 되지는
않을련지... 언젠가는 내가 지금 소중하게 조심스레 싸고 있는 물건들도 버릴 때가 있겠지... 혹시나 모르고 옆에 두었던 물건들도 결국은
버리고야 마니, 불과 얼마전에는 소중하게 보였던 것들도 쓰레기로 전락해 버리는 물건들이 가끔은 삶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모습, 인간 관계,
가치관처럼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한순간 잘해줘서 입 헤~ 벌리고 좋아하다가 조금 섭섭하게 했다고 뾰루퉁해져서 톨아지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 예전에는 정말 친하게 지냈던 여러 정겨운 얼굴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그런 그리운 추억으로
남겨진 모습...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실제로도 지켜져야 하는 가치관들이 지금 와서는 타협된 채 지키고 싶은 것들만 지키는 편한
이기주의적인 모습...
현재 나의 모습은 상자속에 담겨질 소중한 물건인가, 쓰레기통에 버려져도 되는 물건인가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과감히 버렸던, 아쉬움을 품고 버려졌던, 쓰레기는 결국에는 쓰레기일 뿐이죠.
"저 녀석 무지하게 나쁜 놈이야-"하고
여겨지던,
"저 녀석 예전에는 무지 괜찮았는데, 요즘은 왜 그럴까?"하고 여겨지던, 그것은 별반 차이가 없게 느껴지더군요.
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전 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전 무슨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하냐 물으면
부끄러워 답을 잘 못할 것입니다.
이사하는 날에 몇시간에 걸쳐서 짐꾼들이 짐을 하나 둘씩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7시 30분경에
짐들을 나르기 시작하더니, 12시 30분경에 마쳤습니다. 아무 물건도 남아 있지 않는 제 방을 보면서, 특히 책상, 침대, 옷장이 가리고 있었던
벽면들을 새로운 기분으로 보면서, 그냥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어서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정리를
할려고 다시 예전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좀 여유있게 집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치 숨결이 있는 생명체를 대하듯 집을 손으로 살짝살짝
만지면서 둘러보았습니다.
뒷정원에 나가서 주위를 둘러보고 여러 생각을 하였습니다. 새로 이사가는 집이 녹색 정원이 없는 반면에, 그
집은 매우 넓고 평평한, 잔디보다 잡초가 많은 정원이였습니다. 여러해를 거치면서 주로 할머니가 심으셨던 여러 나무들과 채소들... "그래,
한때는 여기에 무슨 꽃이 있었는데, 그걸 없애고 이걸 심었었지. 그러다가 그걸 없애고 다른 것으로 심었고... 그러다가 요것으로 바꾸었고..."
나름대로 정원 구석구석에 무엇이 있었던가 되새겨 보았습니다.
처음 집에 왔을 때 약 20m 높이의 커다란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있었는데, 오래된 나무라서 죽어가서 한 5년 살다가 자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나무가 있던 커다란 둥지 위에 올라가서 그냥 한번 발로 툭툭
쳐보았는데, 발 밑에는 전에 못 본 듯한 커다란 십자 모양으로 크게 갈라진 모습이 보였습니다. 한때는 우람한 자태로 있던 그 나무가 현재는
이렇게 초라하게 있는 모습이 마치 삶의 허무함을 보는 듯 하기도 했습니다.
주말에 잔디 깎는 기계로 뒷정원 손질 하던 일, 잡초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한동안 열심히 잡초 뽑기에 열심히던 일, 봄이 되면 이쁜 꽃들이 피어 바람이 불면 세상적인 향수보다 향기로운 내음을 풍기던
일, 그 앞에서 즐겨 사진 찍던 저희 가족들의 모습,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잘 아는 아저씨 한분이 준 "맹고"라는 과일이 열리는 나무를 심고
몇년이 지난 후에야 첫열매를 따먹고 신기해하던 일... 그 맹고 나무가 처음 뒷정원에 심겼을때는 제 허리 밑이였는데 이제는 제 키보다 더 큰
모습을 보고서 그동안 시간이 참 많이 갔구나를 새삼스레 다시 느꼈습니다.
하지만 뒷정원에서 제일 많이 느꼈던 기억은, 집이 경매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죽은 저희집 개 "미미"였습니다. [8호 글 참조] 정원 어디를 봐도 미미가 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미가 묻힌 곳으로 가서
살아서 미미를 쓰다음어 주었던 듯이 땅을 쓰다듬었습니다. 정원에 있는 빨간꽃 하나를 꺾어 무덤위에 놓고 정겹게 말을 하였죠 - "미미야- 우리
이제 이사 간다. 넌 여기서 계속 집 잘 지키고 있어... 안녕-"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서 걸어 다니는데, 빈집이라서 그런지
신발을 신고 걷는데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불과 얼마전에만 해도 우리 가정의 생활 공간 이였는데... 이제 얼마후면 새로운 가정이 새
꿈을 안고 들어오겠지. 그들은 우리가 소파를 놓은 곳에 식탁을 놓을지도 몰라. 전혀 다르게 이 집을 사용할지도 몰라. 내 방은 과연 누가 쓸까?
이러한 생각들을 9년동안 그 집에서 자라온 기억들과 함께 회상하며 천천히 집의 모든 모서리까지 하나 하나 둘러보며 현관 앞에까지
왔습니다.
문을 나서기 전, 다시 뒤돌아보고, 서글프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에는 이별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집이 선사한 좋은 추억들로 인해 행복할 수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기 전, 전 그 집을 향해서
미소를 띄우고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미소를 보이고 작별할 수 있다는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스치는 모든 인연들을 소중한
인연들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럴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인연과 이별할 때 감사한 마음을 품고 미소를 보이고 작별할 수가 있다면...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항상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하게 마음의 상자속에 보관되어지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생명체 없는 벽돌로 만들어진
집에게도 미소를 보이며 작별할 수 있는데, 어떨 때는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미소에 인색한 모습이 제 모습이 보입니다.
언젠가는
지구라는 이 집에서 이사가는 날이 있을 겁니다. 그때에도 미소를 보이며 작별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소중한 상자 속에 담을 수 있는 것들로 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도 "나"라는 존재를
그들이 아쉬움으로 버리는 존재가 아닌, 끝까지 간직하려다가 결국에는 버리는 그런 존재가 아닌, 소중하게 보관되어지는 존재로 될 수도
있으니까요...
회원님들- 이 년말이 다가기 전에 미소로 1999년을 작별할 수 있는 모습을 준비해보세요. 다가오는 새천년도에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많이 소장할 수 있는, 그런 기억들을 많이 줄 수 있는, 그러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년말 보내시고, 새해에는 복에 파묻혀 살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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