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제 하루하루가 바뻐져서 개인적으로 틈틈히 글 쓰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제 자신도 안타깝습니다. 바로 전 글이 시드니의 불꽃 놀이 축제 이야기와 하버 브리지를 장식한 Eternity의 이야기가 언급되어서, 오늘은 시드니에서 발간되는 주간 교민 잡지인 "주간 생활 정보"에 소개된 "Eternity" 단어를 시드니에 알린 한 노인의 이야기를 제 칼럼에도 소개할까 합니다. 잡지에 소개된 내용을 거의 다 그대로 올린 것이니, 혹 종교적으로 느껴진다해도 양해를 바랍니다>
시드니의 길바닥 보도에 동판조각 같은 아름다운 필체로 마술처럼 등장했던 "Eternity"란 단어는 지난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줄기차게 쓰여져 시드니 구석 구석은 물론 지방 도시로까지 번져갔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의 단어가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알지를 못했다. 자고 나면 여기저기 도장처럼 찍히는 듯한 이 단어는 그 신령한 분위기로 인해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냐는 일부 추측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수십년 후 사람들은 길바닥에 글을 쓰는 말쑥한 차림의 노신사를 목격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미스터 이터니티"(Mr.Eternity)의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퍼져 나갔다.
전설의 주인공은 아서 스테이스(Arthur Stace). 그는 1885년 시드니 레드펀(Redfern)의 한 빈민 가정에서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리셔스 태생의 육체 노동자, 어머니는 포주였다. 이들은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로 자녀들을 학대했다. 스테이스와 형제들은 부모의 끊임 없는 매질을 피하려고 집마루 밑에 삼베 자루를 깔고 새우잠을 자곤 했다. 그리고는 이웃집과 동네 가게에서 우유와 식품을 훔쳐다 먹곤 했다.
날이면 날마다 술에 취해 싸움질을 하던 부모에게 스테이스가 결국 버림을 받고 정부의 보호 대상자가 된 것은 12세때. 그는 어린이 노무자로 탄광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성년이 되기도 전에 술에 취해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누나들은 부모의 강요로 몸을 팔아야 했고 형들은 훗날 알코올 중독자로 폐인이 되어 죽어갔다.
그는 버젓한 직장을 찾아 일을 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붙어 있질 못하고 좀도둑의 길로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가 1916년 1차 대전 참전을 위한 징병 문제로 시끄러울 때 그는 자원 입대했다. 그리고 번듯한 애국 시민이 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됐다. 그가 돌아온 것은 1919년. 그러나 프랑스에서 잔혹한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다른 많은 참전 용사들처럼 그 역시 민간인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불우했던 가정 환경의 무게에 짓눌려 이내 예전의 주정뱅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침내 1930년 어느 날 그는 시내의 한 교회로 기어 들어갔다. 일자리도 없고 돈도 떨어지자 교회의 무료 급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교회의 목사는 이 굶주린 좀도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했다. 목사의 영향으로 그는 청소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시골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의 나의 57세 때였다. 그러나 결혼하기 10년전에 이미 그는 전설을 잉태하고 있었다.
1932년 11월 그는 시내의 다른 교회에서 열린 특별 예배에 참석했다. 설교자는 같은 참전 용사 출신으로 전공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던 존 리들리(John Ridley)라는 목사였다. 그의 설교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 "영원(Eternity)… 이 얼마나 놀랍고 뿌듯하고 영광스러운 말입니까? 영원, 영원, 영원이란 말을 시드니 온 거리에 울려 퍼지도록 외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영원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 영원의 시간을 여러분은 어디서 보내시렵니까?"
스테이스는 교회문을 나설때도 귀에 그 "영원"이라는 단어가 쟁쟁했다. 마침 호주머니에 백묵이 한 자루 있기에 그는 바로 허리를 구부려 보도 바닥에 "Eternity"라고 썼다. 정규 교육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어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못 쓰던 그가 빼어난 글씨체로 서예가나 간판장이를 뺨치는 명필로 그 단어를 써서 자신조차 놀랬다.
이때부터 남 모르게 단어 쓰시가 시작됐다. 생을 마치기 전까지 대략 50만번이나 쓰여졌다. 그는 이것을 그의 사명으로 믿었다. 노환이 그의 발목을 잡을 때까지 그의 사역은 계속됐다. 1965년 양로원에 들어가면서 "내 발로는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게 하나의 예언처럼 사실대로 이루어졌다. 1967년 임종 전 리들리 목사가 양로원의 스테이스를 찾아가 말했다 - "아서, 예수께서 여기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 CKC가 밝히는 뒷 이야기 -
현재도 시드니 중앙에 있는, 시드니의 제일 오래된 우체국 안의 큰 종에는 1963년도에 스테이스에 의해 쓰여진 "Eternity"라는 문구가 많이 희미해졌지만, 보인다고 합니다.
그는 40년전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가 남긴 단순한 업적은 아직도 그의 필체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조차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낙서일 수도 있지만, 근 30년동안 매일 아침 줄기차게 그 글을 시드니의 구석구석에 쓴, 어떻게 보면 그만의 집념이 아직도 살아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새천년을 맞이하는 1999년 12월 31일, 불꽃 놀이를 준비하는 관계자들이 스테이스의 그 단어와 필체를 커다랗게 하버 브리지 위에 밝혀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때의 행사가 끝나 행사 관계자들은 그 단어를 끌어 내릴려고 하지만, 시민 단체의 거센 항의가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계속 거기에 두자고 하는 사람들, 아니면 시드니의 다른 장소에라도 그 단어를 놓아 두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930년대에서 6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길바닥에 쓰여진 신비스러운 글씨체에 신기해 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테이스가 남긴 그 단어는 적어도 이 새천년을 맞이한 시드니의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부모의 학대를 받으면 자란, 한때의 알코올 중독자의 사람이 남긴 업적 치고는 대단하다고 생각 되는군요…
- 그림 설명 -
시드니의 항구를 밝힌 하버 브리지 위의 "Eternity" 단어와 아서 스테이스의 생전의 모습입니다.
* 그림 출처 : http://www.sydney-christian.net/articles/eternity.html


시드니의 길바닥 보도에 동판조각 같은 아름다운 필체로 마술처럼 등장했던 "Eternity"란 단어는 지난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줄기차게 쓰여져 시드니 구석 구석은 물론 지방 도시로까지 번져갔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의 단어가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알지를 못했다. 자고 나면 여기저기 도장처럼 찍히는 듯한 이 단어는 그 신령한 분위기로 인해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냐는 일부 추측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수십년 후 사람들은 길바닥에 글을 쓰는 말쑥한 차림의 노신사를 목격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미스터 이터니티"(Mr.Eternity)의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퍼져 나갔다.
전설의 주인공은 아서 스테이스(Arthur Stace). 그는 1885년 시드니 레드펀(Redfern)의 한 빈민 가정에서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리셔스 태생의 육체 노동자, 어머니는 포주였다. 이들은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로 자녀들을 학대했다. 스테이스와 형제들은 부모의 끊임 없는 매질을 피하려고 집마루 밑에 삼베 자루를 깔고 새우잠을 자곤 했다. 그리고는 이웃집과 동네 가게에서 우유와 식품을 훔쳐다 먹곤 했다.
날이면 날마다 술에 취해 싸움질을 하던 부모에게 스테이스가 결국 버림을 받고 정부의 보호 대상자가 된 것은 12세때. 그는 어린이 노무자로 탄광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성년이 되기도 전에 술에 취해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누나들은 부모의 강요로 몸을 팔아야 했고 형들은 훗날 알코올 중독자로 폐인이 되어 죽어갔다.
그는 버젓한 직장을 찾아 일을 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붙어 있질 못하고 좀도둑의 길로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가 1916년 1차 대전 참전을 위한 징병 문제로 시끄러울 때 그는 자원 입대했다. 그리고 번듯한 애국 시민이 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됐다. 그가 돌아온 것은 1919년. 그러나 프랑스에서 잔혹한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다른 많은 참전 용사들처럼 그 역시 민간인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불우했던 가정 환경의 무게에 짓눌려 이내 예전의 주정뱅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침내 1930년 어느 날 그는 시내의 한 교회로 기어 들어갔다. 일자리도 없고 돈도 떨어지자 교회의 무료 급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교회의 목사는 이 굶주린 좀도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했다. 목사의 영향으로 그는 청소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시골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의 나의 57세 때였다. 그러나 결혼하기 10년전에 이미 그는 전설을 잉태하고 있었다.
1932년 11월 그는 시내의 다른 교회에서 열린 특별 예배에 참석했다. 설교자는 같은 참전 용사 출신으로 전공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던 존 리들리(John Ridley)라는 목사였다. 그의 설교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 "영원(Eternity)… 이 얼마나 놀랍고 뿌듯하고 영광스러운 말입니까? 영원, 영원, 영원이란 말을 시드니 온 거리에 울려 퍼지도록 외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영원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 영원의 시간을 여러분은 어디서 보내시렵니까?"
스테이스는 교회문을 나설때도 귀에 그 "영원"이라는 단어가 쟁쟁했다. 마침 호주머니에 백묵이 한 자루 있기에 그는 바로 허리를 구부려 보도 바닥에 "Eternity"라고 썼다. 정규 교육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어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못 쓰던 그가 빼어난 글씨체로 서예가나 간판장이를 뺨치는 명필로 그 단어를 써서 자신조차 놀랬다.
이때부터 남 모르게 단어 쓰시가 시작됐다. 생을 마치기 전까지 대략 50만번이나 쓰여졌다. 그는 이것을 그의 사명으로 믿었다. 노환이 그의 발목을 잡을 때까지 그의 사역은 계속됐다. 1965년 양로원에 들어가면서 "내 발로는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게 하나의 예언처럼 사실대로 이루어졌다. 1967년 임종 전 리들리 목사가 양로원의 스테이스를 찾아가 말했다 - "아서, 예수께서 여기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 CKC가 밝히는 뒷 이야기 -
현재도 시드니 중앙에 있는, 시드니의 제일 오래된 우체국 안의 큰 종에는 1963년도에 스테이스에 의해 쓰여진 "Eternity"라는 문구가 많이 희미해졌지만, 보인다고 합니다.
그는 40년전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가 남긴 단순한 업적은 아직도 그의 필체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조차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낙서일 수도 있지만, 근 30년동안 매일 아침 줄기차게 그 글을 시드니의 구석구석에 쓴, 어떻게 보면 그만의 집념이 아직도 살아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새천년을 맞이하는 1999년 12월 31일, 불꽃 놀이를 준비하는 관계자들이 스테이스의 그 단어와 필체를 커다랗게 하버 브리지 위에 밝혀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때의 행사가 끝나 행사 관계자들은 그 단어를 끌어 내릴려고 하지만, 시민 단체의 거센 항의가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계속 거기에 두자고 하는 사람들, 아니면 시드니의 다른 장소에라도 그 단어를 놓아 두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930년대에서 6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길바닥에 쓰여진 신비스러운 글씨체에 신기해 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테이스가 남긴 그 단어는 적어도 이 새천년을 맞이한 시드니의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부모의 학대를 받으면 자란, 한때의 알코올 중독자의 사람이 남긴 업적 치고는 대단하다고 생각 되는군요…
- 그림 설명 -
시드니의 항구를 밝힌 하버 브리지 위의 "Eternity" 단어와 아서 스테이스의 생전의 모습입니다.
* 그림 출처 : http://www.sydney-christian.net/articles/eternit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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