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이름이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75년 대한민국 대전에서 태어났을 때 주어진 "최창권"이라는 제 한글
이름이고, 또 하나는 83년도에 처음으로 호주 땅을 밟았을 때 편의상으로 만들은 영어 이름 David Choi입니다. 편의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학교에 가면 분명히 호주 학생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버지의 현명한 판단 아래에 몇 개의 영어 이름을 지어서 저에게 보여
주셨는데, 그 당시 초등학교 2학년에 막 올라온 저로써는 어떤 영어 이름이 좋은 것인지 당연히 몰랐죠... 그래서 그때 저한테 주어진 몇몇의
영어 이름 가운데 제가 선택한 것이 David이였습니다. 그 이름이 무지하게 흔한 이름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호주에 있게 된지 얼마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와서 이름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죠. 만약 영어 이름을 안 만들었다면 전 지금까지도 제 이름이 이렇게 불려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채-애-앵~~ 쿼~~~어-언~~~" ^^
제 동생 이름은 최현정인데, 얘는 처음 몇주간은 자신의 한국 이름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호주 사람들에게 제 동생 이름 발음하기는 제 이름 발음하기보다 더 힘든가 봅니다. 특히 "현"자 발음을 절대로 못하는데...
"히~~이~~얀~~~저~~엉~~~" -_- 아직도 호주 사람들은 "현대"를 "히이얀-데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안다면 이해가 갈 겁니다. 그래서
제 동생도 몇주간 자신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못 참았는지 영어 이름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보낸 학창 시절에 전 쭉
David이라고 불려 왔습니다. 93년도에 호주 시민권자가 된 후로는 이제 그 이름이 제 정식 이름이 되었습니다. 서류상으로, 법적으로
"최창권"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그 인물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집에서는, 한국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 한국 이름이 쓰여집니다. 친한 한국 친구가 아니라면 제 한국 이름, 영어 이름 둘 다 알기에는
힘듭니다. 제 한국 이름이 있다는 것 조차 알려는 호주 사람들은 그보다 더욱 더 드물죠.
98년 8월부터 99년 8월까지 전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 교사라는 직책으로 근무했었습니다. 자격 조건은: (1) 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자
(2) 해외 체류
기간이 10년이 넘는 자
(3) 해외 시민권자
어떻게 보면 교사의 자격으로써 많이 부족하다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원어민 교사의
주 활동이 생활 영어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어서 저 같은 사람도 모국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물론 신청할 때 전 호주 시민권자로써
신청하였기에 이름도 David Choi로 올렸습니다.
서류 접수와 면접 시험을 통과한 후, 한국에 98년 8월 17일에 도착하였고,
근무지인 울산에는 8월 31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기간동안 전 학생들과 선생님들 사이에 그냥 "David"으로 불려지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오히려 저에게는 더 어색했습니다. 제 영어 이름이 무척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나, 한국
사람들이 전부 다 저를 영어 이름으로 호칭한다는게 좀 이상했죠. 시드니에 살면서도 한국 사람들은 절 "창권아~", "창권이 형~", "창권이
오빠~"라고 불렀는데, 모국에 들어와서 오히려 한국인들이 제 영어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쩔
때는 솔직히 약간 우쭐대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마돈나"와 같이 한 고유 명사(?) 같은 이름으로 불려지고 사람들이 알아준다는게 기분
나쁘지는 않거든요. 영어 교과서에도 흔히 나오는 이름이라 많은 분들이 쉽게 절 기억해 주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하도 주위 사람들이 절
David이라고 불러줘서 다른 사석에서도 전 으레 제 자신을 "David입니다"하고 소개하곤 했죠.
많은 한국분들이 제 성씨인
"최"의 영문 표기중의 하나인 Choi에 상당히 우스워 하신 것 같았습니다. "초이? 초이? 그게 무슨 성이지?"하고 고개를 갸웃둥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제 호주 친구들은 제 별명으로 Choi-Boy라고 많이들 불렀습니다. 그냥 특별한 뜻이 있는게 아니라 Choi와 Boy가 음운이
비슷해서 그렇게 부른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도 David이라는 제 영어 이름에는 많은 애착과 친근감이 가지만, 아직도 Choi라는 제 성씨에는
제 자신조차 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뭔가가 맞지 않는 느낌... 그래서 전 간혹 원래 제 성은 "최"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전 외국인이였기 때문에 외국인 등록증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주민 등록증이 없기 때문에 그걸 신분증 대신으로
써야 했습니다. 간혹 신분증을 대야하는 상황에 외국인 등록증을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그걸 보고 더 신기하게 절 쳐다보곤 했죠. 또
한국 체류시 있었던 의료 보험증에는 제 이름을 한글식으로 표기한게 좀 잘못되어서 "다비드 최"로 되어 있었습니다. 가끔 병원에 가서 제 의료
보험증을 보여주고 (절 전에 못 본 간호원은 "이게 뭐야~~~"하는 표정을 짓죠...) 제 순서를 기다리다가 간호원이 사람들 많은 대기실에
"다비드씨~~~ 다비드 손님 들어오세요~~~"하면 대기실의 다른 손님들이 다 두리번 거리고 전 쑥쓰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뒤에서 수근거리는 것이 느껴지기도 해서 휙- 돌아서서 "저 교포에요~~~"하고 변명하고픈 때도 있었구요.
지금
운영하는 이 칼럼 신청을 할 때에도 주민 등록 번호를 적으라는 칸을 봤을 때 좀 당혹스러움과 (한국에서 주민 등록증 보여 달라고 할
때처럼...) 법적으로는 한국인이 아닌 제 현실을 또 봤습니다. 몇번의 시도 끝에 그냥 아무렇게 번호를 넣었는데, 운이 좋게 그중 하나가
받아들여져서 지금 이 칼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다른 분의 주민 등록 번호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그 분께
사과드립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에 있으면서 전 다른 Identity로 살아간 적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제 한국 이름도 아니고, 완전한 영어 이름인 David Choi도 아닌, 그냥 외자 이름 David으로 살은 적이 많으니까요. 무슨 영화에 보면
스파이나 "자칼"같은 청부 살인 업자들이 여러개의 신분증을 가지고 다른 모습으로 변장해서 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니라도 적어도 2개의 이름이 있고, 때로는 어떤 이름을 현재 나타내고 있냐에 따라 제 행동이나 말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창권"일 때는 "썰렁하다"라는 말을 알아듣는 한국인, (영어로 "썰렁함"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사오정 시리즈 외 최신 한국 유머를 서로 해 줄 수 있는 한국인, 간혹 한국 연예인 이야기를 할 때 공감대가 형성되는 한국인... "최창권"일
때 전 그런 한국인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그들과 위의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 원합니다.
"David Choi"일 때는 호주의 정치나
호주인들의 스포츠, 여기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무엇이고 그 맛이 어떤지 아는 호주인들, 한국 유머와 또 다른 서양 유머를 즐기는 호주인,
호주에서 느낄 수 있는 느긋함과 낙관적인 성격이 비쳐지는 호주인... "David Choi"일 때 전 그런 호주인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대화하길
원합니다.
교민 1.5 세대는 어떻게 보면 카멜레온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슈퍼맨이 평상시에는 신문 기자였다가도 그 푸른
의상과 빨간 망토를 두르면 지구를 구하는 사나이가 되듯이, 교민 1.5 세대들도 그만큼 차이가 나는 두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하나이되 이름은 2개... 우리는 두 문화를 물려받음 동시에 두 이름, 두 인격까지 물려 받은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 이름 다 부인할 수
없고 인정하는 것 또한 1.5 세대이죠. 위선적인 이중 생활이 아닌, 두 문화 사이를 오가면서 생기는 이중 생활입니다. 1.5 세대를 완벽히
이해하실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어 이름의 삶 또한 보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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