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낙서

난 재수 없는 놈?

CKChoi 2001. 4. 6. 16:12
1. 난 참 재수 없는 놈

몇 주 전에 감기 몸살을 앓았다.
열도 좀 나고, 코도 콱 막히어서 코로 숨 쉴 수 있다는 것도 작은 축복이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꼈다.
게다가 편도선까지 무척 부어서 음식물을 삼키는데 좀 불편하였다.
조금 피곤하면 편도선이 금방 부었고, 예전부터 비염이 약간 있는 것 같아서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몇 년 전에 여동생이 비염 수술과 편도선 제거 수술을 겨우 수개월 사이에 한 것이 떠오르니 그 때
동생이 입원하여 고생한 기억들이 떠올라서 괜한 걱정만 더해갔다.
부모님은 그러한 증상들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혹시 한대를 건너 뛴 유전적인 것들인가 하고
나름대로 추측도 하였다.

병원을 찾아가니 의사 선생님은 좀 강력한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다.
내 편도선과 기관지를 간단히 진찰하고 예전부터 계속 이러했고 항생제가 별 소용이 없다면
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전문의를 찾아갈 수 있게 진단서를 써주겠다고 하였다.
(호주에서는 보통 몸이 아프면 개인 의사 - General Practitioner, 약칭으로 GP - 를 찾아가고,
GP가 정확한 병명을 고르거나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을때 전문의에게 진단서를 써준다.
전문의는 GP의 진단서가 있어야지만 찾아갈 수 있고, 수술이 필요해서 해야 한다면 전문의가
병원에 진단서를 써 준다.)

어쩌면 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근심이 생기기 보단 화가 났다.
왜 그러한 증상들이 내 몸에 있어서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그 날 병원을 떠나면서 문득 난 무척 재수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온전한 신체

친구 중에 H라는 녀석이 있다.
시드니에서 서로 알고 지낸지 이제 11년 째로 접어 든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H는 한 학년을 낮추어서 학교에 입학하였기에 본의 아니게 내 고등학교
후배가 된 친구이기도 하다.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쾌할한, 남자들이 친구로 삼기 좋아할 스타일인 친구이다.
그 정도 얼굴에, 그만한 성격이라면 바람둥이(?)로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본성이 착하고 소박하여 항상 수수한 옷차림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에서 그러한 악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루는 그 친구에게 전화 하였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덤덤하고 태연하게 말해서 오히려 나를 더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일하는 사무실에서 H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안쪽의 누가 문을 세게 닫는 바람에 손가락이
문닫이에 걸렸는데, 오른쪽 집게 손가락 첫마디가 절단 되었다는 것이다.
H 본인도 너무 황당하고 놀래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지압으로 급하게 누르고 다시 문을 발로
차서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안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찾아 내라고 소리쳤단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단된 그 작은 손가락을 가지고 병원을 찾아갔지만, 다시 붙일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가 않는 것이었다.
현대 의학이 좋다고 하는데 내 친구의 절단된 손가락도 붙이지 못한다는 것에 허탈하기도 하고
대상 없는 분노까지 일었다.
게다가 H는 산업 디자인을 공부한 친구이기 때문에 어쩌면 손이 생계의 수단이고 자신의
창의력을 분출할 수 있는 도구인데, 바로 펜을 붙잡는 오른 집게 손가락이 절단 되었으니 본인이
느꼈을 절망감을 상상하니 너무 마음이 아펐다.
아니, 그러한 것을 떠나서,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하지만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이 더 이상 없는데
그것을 잘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전화 통화 며칠 후에 H가 집에 잠시 들렸다.
아직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는 채, 하지만 예전의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 왔다.
사고의 더 자세한 경위도 들었고,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도 해 주면서, 나에게는 너무나 큰
일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평상시 대화처럼 하는 H가 안쓰럽게 보이면서도 놀라왔다.

H가 이야기 도중에 오른손을 식탁 위에 놓다가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자신의 손을
잠시 쳐다 보았다.
그리고 말하길, “참 이상하다. 예전에 손을 이렇게 올려 놓으면 집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함께 바닥에 닿았는데, 지금은 예전보다 이 손가락을 더 내려 놓아야 바닥이 느껴지는구나.”
그리고선 나를 보며 싱긋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마 적응해 나가기 좀 힘들겠지? 지금은 이렇게 붕대라도 감고 있으니 볼 수 없어서 다행이지,
이 붕대마저 풀고 나면 그때서부터 내 삶의 작은 습관들도 바꾸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 절실하게 날 것 같아.”

뭐라고 위로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하였다.
오히려 사고를 당한 당사자보다 더 우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예전과 똑같이
대해 줄려고 했을 뿐이었다.

손가락의 첫마디라고 해봐야 아마 2cm 안팎의 길이이겠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자만이 그
소중함을 절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체의 작은 부분일지라 하더라도 그 모두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것도 커다란 행운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3. 운이 좋은 사람

시드니는 한국과는 정반대로 세상이 돌아가기에 여긴 이제 가을로 접어 들어서 간혹 써늘한
공기도 느껴진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얼마 전에 아주 오랜만에 독서를 하게 되었다.
“사랑해요 워 아줌마”라는 책이었는데, 1940년대 중국에서 태어나 아주 어렸을 적에 맹인이
된 “루시 칭”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었다.
워 아줌마는 저자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돌보던 가정부이다.
저자가 맹인이라고 당시 주위에서 모두 자신을 경멸하고 무시할 때, 유독 워 아줌마가 자신의
제일 커다란 힘이 되어 주고 실질적이 도움을 주어서 책 제목이 그렇게 번역되어진 것 같다.

루시 칭은 맹인이었지만 독학으로 점자를 익히고 배우려는 의지가 확고하여 정상인들이 다니는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며, 나중에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장애인을 위한 특수 교육을 배워 홍콩에
돌아와서 자신과 같은 맹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회 봉사자가 되었다.

그녀의 대단한 학구열도 놀라웠지만,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인생 목표를 확실히 세워서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 더더욱 존경스러웠고 놀라웠다.
특히 그녀는 당시 맹인들에게 온갖 미신적인 편견과 곱지 않는 시선을 던진 중국 사회 속에서도
그 어려운 역경을 모두 이겨내고 의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여 그 결과가 매우 값져 보였다.

예전에 나보다 어린 일본 청년 오토 히로다케가 쓴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도
그러 했지만, 신체적으로 나보다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감동도 받고 도전도 되지만,
그보다 더 큰 부끄러움을 내 자신이 느낀다.
그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 내가 있는데 내 삶의 열매는 그들보다 못하다 생각 되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루시 칭은 시각적인 것들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불행하고 불쌍한 여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책 원제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
“One of the lucky ones”
“운이 좋은 사람들 중의 하나”
불행과 자기 연민은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다.

4. 에필로그

작은 병치레를 인하여 난 참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부끄럽고 부질 없는
투정이었는지 지금 또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나의 친구를 통해서도 나의 그러한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가까운 이웃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다시 한번 세어보고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의 불행을 통하여 내 자신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상대적으로 내 상황을 돌아보고 반성하고자 하는 바이다.

온전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손가락 마디가 하나 절단되어도 자신의 신체가 온전치 못함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것을
바라보는 이조차 커다란 안타까움을 느낀다.
세상을 바라볼 수 없어도, 두 눈 똑바로 보이는 이보다 더 온전한 생각으로 더 온전한 인생을
설계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신체적으로 온전할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온전치 못하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일까?
겉으로는 온전하게 보이지만 속사람이 불구인 모습과,
외모는 불구이지만 속사람이 온전한 두 모습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할 용기가 나한테는 있는지?

난 온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
온전한 마음을 추구하고 있다.
난 겉이 온전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또한 속이 온전한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를 할 수 있는 행운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니 난 참 재수가 좋은 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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