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낙서

출근길에서

CKChoi 2001. 1. 14. 21:16

보통 직장인들에게는 아침부터가 스트레스의 시작인 것 같다.
출근길에서부터 교통 체증과의 싸움, 대중 교통 이용자들은 군중들과의 밀리고 밀치는 싸움…
하긴, 얼마전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호주인 직장인들에게 행한 설문 조사에서
그들의 가장 큰 일 관련 스트레스 1위로 꼽은 항목이 바로 바로 출퇴근길의 여정이라고 한다.
그 대답을 잘못 해석하면 호주에서의 직장 생활은 별로 스트레스가 없어서 겨우 출퇴근길이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잘못 비추어 질지도 모르겠다.

집이 직장에서 약 25km 떨어진 거리임으로 나 역시 차로 45분간 운전하여 회사에 도착한다..
러시 아워 (rush-hour) 중에서도 특히 아침에 맞이하는 출근길에서의 교통 체증은 정말 짜증 난다.
내 성격이 아침에서의 그 교통 체증으로 인하여 약간 난폭(?)해진 것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운전하면서 양반 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 느껴진다.
한번의 잘못된 상황 판단 착오로 옆차선 차들이 나보다 앞서 가고 난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리고 세상이 참 불공평하게 느껴질 때는 꼭 내 앞이나 주위에 이상한 운전자들이 있어서
마구 끼어든다거나, 급브레이크를 밟는다거나, 제한 속도에 훨씬 못미치게 천천히
가는 자들이 있을 때이다.

이제는 운전하면서 차가 신호등 앞에 정체된 상황에 약간 졸기도 하는 프로(?)가 되었다.
약간의 틈에 잽싸게 끼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하도 같은 길을 오가서 어느 차선이
좀 더 잘 빠지는지, 어느 시간대에는 어떤 길이 괜찮은지도 좀 파악이 된다.
늦잠이라도 잔 날은 차가 잠시 선 틈을 타서 좁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겨우 겨우 메기도 한다.

검게 탄 것 처럼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면서 내 주위를 간혹 살펴 보기도 한다.
나 외에도 어딘가를 바쁘게 가는 사람들…
그들의 대부분을 난 어쩌면 이름도 모르고, 한번도 대면해 보지 않은 채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자라 왔으며, 내가 모르는 어떠한 삶의 모습을 보았을까?
그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면서 자신의 목적지로 가는 것일까?
그들의 목적지는 과연 어디인가?

그러한 잡념에 파무칠 때 간혹 한 떼의 새가 하늘 위로 가로 지르는 모습을 볼 때라면
복잡 시끌한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묘한 정적의 순간을 보는 듯 하다.
아주 잠시지만 그러한 장면은 마치 느린 화면으로 보는 듯 하다.
들리지는 않지만 푸드득- 하는 그들의 날개짓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새들을 보면서 자유스롭게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동경하기도 한다.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도 잠시뿐…
난 움직이는 차량 행렬에 다시 동참해야 한다.

하루는 출근 길에 커다란 무지개를 본 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절로 입을 벌리고 아주 짧게 감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경에서 이 세상의 첫 무지개는 노아의 방주 일화와 함께 등장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그가 살린 동물들이 방주에서
내려 고요하고 공허한 젖은 땅 위에서 첫 무지개를 바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와 너무나 비교되게 당시 내가 본 무지개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매연과
차량 소음 사이로 본 것이었다.

하루는 초등 학생들을 실은 버스와 잠시 나란히 동행하고 운전하고 있었다.
또 어떠한 연유로 앞의 길이 막혀 난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나름대로 짜증을 내지 않으려 하였다.
머리를 손 위에 얹고 팔꿈치를 차창에 기대어 앞 차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을 때,
힐끗 옆의 버스를 쳐다 보았다.
버스 안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맑은 소리는 버스와 내 차의 공간이 막아 들을 수 없어서 마치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왠지 모르게 그들이 부러웠다.
세상 걱정 없어 보이고, 나의 잃어버린 모습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한 어린 소녀가 나를 쳐다 보았다.
금발 머리에 맑은 푸른 눈을 가진 소녀였다.
교복의 일부분인지 머리에는 작은 모자를 쓰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나를 바라 보았다.
나도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그 소녀를 바라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 보기에는 민망해서, 그리고 그 소녀가 귀엽게 보여서
싱긋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도 생긋 웃어 주었다.

앞의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나의 차와 그녀의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내 시선을 그 소녀로부터 띄기 전에,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도 짧게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짧았던 순간에 웃음과 손 흔들음으로 안부 인사와 작별 인사를 한 셈이다.
내가 있던 차선이 더 빨리 움직여서 난 그 소녀가 탄 버스를 앞서 가기 시작하였고,
다시 그 소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그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내 아이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면 그녀가 나를
떠올리면서 생긋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 줬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출근길에,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surreal 한 장면들이
그나마 잠시 여유를 느끼게 한다.
자유스러움을 보여주는 한 떼의 새들이 그러하고,
수천년간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꾸준히 나타나는 무지개가 그러하고,
이름 모르는 한 어린 소녀의 순박한 웃음과 꾸밈 없는 손 흔들음이 그러하다.

자유, 꾸준함, 순박함-
얼마나 갈망하고 원하는 것들인가?
그러한 것들을 접하고 나서 활력도 느끼고 상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을 갈망해서일 것이다.

스트레스만 받을 수 있는 출근길에서 그나마 이러한 생각들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러한 감정들을 건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 드린다.
다음 주에는 다시 한번 그 이름 모르는 귀여운 소녀를 만나고 싶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손을 흔들어 줘야지…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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