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낙서

낮아지는 양심 지수

CKChoi 2006. 10. 31. 13:55

우리 가족이 처음 호주에 도착했던 1983년도의 모습과 지금 현재 호주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어렸을 적에는 교통 체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것 같은데, 요즘은 주차장처럼 움직이지 않는 차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도로 위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예전에는 길거리에서 다른 낯선 한국 사람을 보면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는데, 이제는 시드니 어디를 가도 한국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변화는 더 많아진 사람들과 차량들로 인해 복잡해진 길거리나 확연히 늘어난 한국 교민들의 숫자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20여년전의 호주는 지금보다 더 순수했고 순박했던 모습이었다.

호주에 처음 왔을 때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잠 들거나, 밖에 세워둔 차를 잠그지 않고 집으로 그냥 들어와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은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러한 때마다 우리 가족은 모두 호주가 이래서 살기 좋구나하며 신기해 했었다.

 

전형적인 호주의 전원주택 모습은 앞마당의 담이 무척 낮다.

그 낮은 담은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와 자신의 집정원과의 구분선만 구성할 뿐이었지 누구를 막거나 자신을 숨기려는 의도는 숨어 있지 않아 보인다.

한국처럼 간혹 볼 수 있는 높은 담도 모자라서 담위에 깨진 병조각을 놓거나 철조망이 놓여진 정경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근래에 새로 만들어지는 주택들은 담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인 것 같아 예전에 무릎 밑으로만 나돌던 그런 정겨운 앞마당 담벼락이 그리워진다.

 

몇 달 전 정직함은 더 이상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Honesty is no longer valued) 라는 우울한 제목의 사설 하나를 읽고서 변해가는 호주의 모습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시골 동네의 한 과일 가게는 지난 수십년간 특이하게 운영되었다.

과일과 야채는 어느 가게와 다름 없이 진열해 놨지만, 가게 출구에는 카운터도 없고 가게 직원도 대기하고 있지 않는다.

다만 출구 앞에 작은 상자가 있는데, 과일이나 채소를 고른 손님들이 양심껏 돈을 그 상자 안에 지불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물건에 대한 지불을 전적으로 맡기는 양심 제도로 가게를 운영해왔다고 한다.

그러한 양심 제도를 수십년간 운영해 왔지만, 몇년전부터 돈을 내지 않고 물건만 그냥 집어가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서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매상의 어려움을 겪는다.

가게 주인들은 그래도 수십년간 지켜왔던 양심 제도를 계속 유지하고자 카메라도 설치해보고, 물건을 훔쳐간 사람들의 사진도 가게에 붙여 놨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비양심적인 도둑놈(!)들은 카메라를 보고 오히려 조롱을 하거나, 자신의 사진이 가게에 붙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에 다시 버젓히 나타나 또 도둑질을 하고 나갔다고 한다.

 

 

 

<양심 제도를 운영하던 과일 가게에서 전시해 놓은 사진 - 물건값 지불을 하지 않은 비양심적인 손님들과 그 사람들이 타고 왔던 차량 번호를 함께 기재함.  이러한 사진을 전시해 놓음에도 불구하고 어떨 때는 사진속 주인공들이 며칠후에 다시 가게를 찾아와 또 물건을 훔쳐가곤 했다고 한다>

 

결국 수십년간 운영 되어왔던 양심 제도의 과일 가게는 이제 주인에게 막대한 손해만 입히게 되어 아쉽게도 문을 닫게 된다.

매우 슬픈 날이다라는 가게 주인의 한숨과 함께

 

 

<양심 제도로 운영 되던 과일 가게를 닫게 된 상점 주인 Mr Wright (가운데 노인)>

 

 

같은 사설에 또 하나의 우울한 사실이 언급 되었는데, 바로 사라져 가는 교회와 성당의 모금함이다.

예로부터 시드니의 많은 성당이나 교회 본당 입구에는 사람들이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기부한 돈을 모으는 모금함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 잔도둑들이 이 모금함을 훔쳐가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늘어나 어떠한 교회들은 보기 흉한 금속재로 모금함을 단단하게 땅에 고정시키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그 돈을 훔쳐가는 자들이 과연 불우이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행동들로 인해 모금함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그만큼 뻗쳐질 수 있는 순수한 도움의 손길의 반경 또한 줄어든다는 것을 그 비양심적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지상 낙원이라고 불리웠던 이 호주도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삭막해지는 경쟁 의식, 그리고 점점 퍼지는 물질 만능주의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곯아가고 있어 안타깝다.

예전에는 흔히 볼 수 있었던 호주 사람들의 여유로움, 배려, 낙천적인 견해 등도 멀지 않은 미래에는 진기한 덕목으로 바뀌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IQ, EQ 지수가 있듯히 시대별로 한 사회의 양심 지수를 재 볼 수 있으면 그것 또한 참 흥미로울 것 같다.

정확한 치수는 모르겠지만, 그냥 나의 둔한 감으로도 느껴지는 것은 예전보다 현재 사회의 양심 지수는 많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시대에 양심 제도로 운영 되어지는 과일 가게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한 욕심일까?

호주라서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가게가 존재할 수 있었지 다른 나라였다면 아마 오래전 없어졌을거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여기가 그나마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자위해야 하나?

어렸을 적 현관문을 실수로 안 잠그고 잤다 하더라도, 길에 세워둔 차를 잠그지 않고 그냥 집에 왔다 하더라도 안심하고 그냥 믿을 수 있었던, 그러한 시대는 정녕 다시 오지 않는 것일까?

그냥 순수하게 누군가를 믿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

사람들의 순박한 눈빛을 더 자주 보고 싶고 선한 마음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다.

그런데과연 오늘 나의 양심 지수는 어떻게 될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모습을 내 자신부터가 갖추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 되지않나 싶다.

 

 

 

** 사진 출처: The Daily Telegraph website (http://www.news.com.au/dailytele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