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낙서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CKChoi 2006. 8. 15. 01:09

몇주전 한 교민 언론 매체에서 본 작은 동정란의 소식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의 한분이셨던 할머니 한분이 호주에 오셔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고발하는 강연회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예전에 그분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었기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당시생존자분께서 직접 먼 호주땅까지 오신다니 꼭 참석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분들의 사연보다 더 서글픈 사실은 당시 생존자분들의 육성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자 예의상이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 될 듯 싶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지난 토요일, 강연회 장소인 시드니 제일교회로 향했다.

작은 교육관으로 들어서자 당시 자료 사진들, 현재 수요 집회 사진들,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의 그림들, 영어 번역본으로 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들, 그리고 영문으로 제작된 일본군 위안부 실상을 고발한 리포트 문서 등등이 있었다.

당시 상황들을 보여주는 흑백 사진들을 보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가슴은 현재에도 노구를 이끄시고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시는 모습이 담긴 컬러 사진들을 볼 때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시 후 40여명 인원이 모인 교육관에 모두들 자리를 잡았고, 지워지지 않는 역사라는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시청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욱- 하고 올라오는 눈물을 남자라는 허울 때문에 참느라 혼났다.

들에서 놀다가 납치되거나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위안부가 된 소녀들

하루에도 수십명씩 되는 남자들을 받느라 제대로 씻을 시간도 없어 머릿맡에 놓여진 김밥을 누운 상태에서 살기 위해 억지로 입으로 가져간 먹은 여성들

도망치다가 다시 잡혀온 위안부가 벌거벗긴 상태로 밧줄에 꽁꽁 묶여 여러 군인들의 발길질을 받다 어느 일본 군인이 그녀의 가슴을 칼로 베어버린 모습을 보아 실신했다고 말씀하시는 어느 할머니

 

좌중이 모두 숙연해진 순간, 한국에서 오신 84세의 장점돌 할머니께서 본인의 역경 많은 삶을 증언하셨다.

14세때에 만주로 끌려가 나중에는 싱가폴까지 이르러 일본군 위안부, 아니 성노예로 살았던 악몽 같은 시간들을 말씀해 주셨다.

만주의 추운 겨울에 이불이라도 덮고 싶은데 그것 마저 빼앗아간 일본 군인들.

15세에 첫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죽은 사산아를 동료 위안부들의 도움으로 낳은  이야기.

비록 사산아였지만 출산은 출산인데, 제대로 몸조리도 하지 못하고 겨우 냉수나 몇잔 마시고 3일후부터 다시 수많은 군인들을 받아야 했던 일.

탈출을 시도하였다가 다시 붙잡혀 엄청나게 많은 매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주전자 가득 고춧가루 섞인 물을 코로 억지로 쏟아붓는 잔혹한 물고문을 받으셨던 일.

당시 심한 발길질로 인해 귀를 심하게 다치시어 지금도 귀가 울리고 머리에 통증이 있어 한국에서 호주까지의 긴 비행 여정이 무척이나 힘드셨다는 이야기.

해방 즈음에 돌 갓 지난 아기를 데리고 고향으로 귀향했는데 아무도 자신을 반겨주는 자 없고 오히려 손가락질만 받아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셔야 했던 일.

그 딸마저 나중에 심장병이 걸려 본인이 5년간 남의 집 종살림을 하는 댓가로 돈을 빌려 미국에 딸을 치료하기 위해 보냈는데, 결국 그 딸마저 미국땅에서 죽어 아무런 혈육이 없으신 장점돌 할머니.

 

한국 민족을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들 하지만, 장점돌 할머니 단 한분의 한 서린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난 감당하기에 벅찼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위안부가 2차 세계 당시 동남아시아에 모두 20만명이 있었다는 일이다.

전쟁 중 남자들이 성욕을 이기지 못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 아니라, 위안부 제도는 일본 정부가 세밀하고 조직적으로 지시를 내려 여자들의 모집, 운송, 배치, 전후 처리 과정까지 모두 지시하고 문서적으로 기록에 남겨진 일이라고 한다.

위안부 숫자가 20만명이라는 추정치도 일본 정부에서 내려진 일본군 100명당 위안부 1명을 배정하라는 확보된 공식 지침 문서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한다.

상당량의 문서적인 증거 및 수많은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일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사죄는 커녕 그러한 현실 자체를 부인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일본 우익 단체들은 위안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집했다는 망언도 내뱉는다.

2000년부터는 일본 교과서에 작게나마 언급이라도 되었던 위안부 제도가 아예 삭제 되었다고 한다.

 

그날 함께 참석하신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정대협) 윤미향 사무 총장께서 하신 일차적인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지만, 이차적인 책임은 한국 사회에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 수많은 위안부 여인들은 한국 사회에, 자신의 고향에 제대로 정착하여 살지 못했으며, 오히려 사회의 냉대와 손가락질을 받아야했다.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위로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더 큰 나락의 소용돌이로 밀쳐내었던 자들이 바로 같은 핏줄을 나눈 우리였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그냥 역사 속으로 묻혀 흘러가게 하는 방관자의 노릇을 하고 있다.

행사가 마친 후 자리를 둘러보니 30대 청년은 나밖에 없어 보였고, 행사 자원 봉사자로 보이는 몇몇 20대 청년들 외에 자발적으로 강연회 참석을 한 젊은 친구들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일본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들의 역사 인식이 먼저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대협 윤미향 사무총장의 또 다른 말이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게 되었는데, 바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같은 사람에게 희망이란 어찌 보면 너무나 손쉽게 가질 수 있고, 상상해 볼 수 있고, 또 내가 원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줄 수도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내가 가진 희망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슬픔이 더 커진다.

해방 후 반세기동안 침묵 속에서 살다가 1991년 김학순 할머니 같은 용감한 분들이 처음 위안부 실상에 대해 증언을 하게 됨으로 일반인들에게 위안부라는 존재를 어렴풋이 알릴 수 있게 되었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슴에 품어 두고 살아야했던 참혹하고 어두운 과거의 무게는 위안부 시절 견디어내야 했던 고통보다 더 힘들지 않았을까?

사죄의 뜻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15년간 끊임 없이 법적 투쟁을 벌이고,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그러한 몸부림 가운데 작은 희망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는 윤미향 사무총장의 말에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약하고 어설픈 위로의 한마디로 그분들에게는 희망을 드릴 수 없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소득이 없어 보이는 그분들의 작은 몸부림에 동참을 하여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그분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리는 것은 아닐련지 생각해 본다.

첫 광복절을 맞이한 후 이제 6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잊혀두고 무관심했던 용감한 여성들에게 따뜻한 희망을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바른 인류애요 동포애가 아닐까?

 

 

 

<수요 시위 모습.  사진 출처 - 정대협 홈페이지>

http://www.womenandwar.net/bbs/index.php?mode=V&id=221&page=1&tbl=M023&TOT=184&SK=&SW=

 

<관련 링크>

정대협 홈페이지

http://www.womenandwar.net/index.php

한국 신문 (호주 한인 언론) 기사 - 푸른눈 위안부 얀 (Jan) 할머니와 장점돌 할머니의 만남

http://www.koreanherald.com.au/stories.php?topic=&story=06/08/10/3286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