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낙서

결혼 이야기

CKChoi 2004. 3. 2. 21:20

한때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스치는 수많은 옷깃들 사이에서도 나의 예정된 짝이라면 눈만 마주쳐도 서로 짜릿한 교감을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와 이루어져야만 하는 짝이라면 나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다면 서로 못 만나고 엇갈리는 그러한 일은 없을 거라 여기던 적이 있었습니다.

 

낭만을 잃어가는 것이었는지, 단순히 나이가 들면서 치루는 대가였는지는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자 시작부터 그러한 열정적이고 불꽃 튀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얕아 졌습니다.
아니, 그러한 만남과 사랑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앝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러한 만남과 사랑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은 앝아 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간혹 군중 속에서 갑작스런 외로움이 엄습해오면 어쩌면 내가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눈길을 찾고자 잠시라도 애타게 주위를 둘러보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년 반 전에 한 여자를 시드니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서로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던 남녀의 만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첫만남 자체가 매우 간결하고 평범하게 느껴졌으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 이전의 모든 만남들이 그날의 만남 하나를 연결해주기 위해 거쳐야 했던 과정으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그녀는 새로 옮긴 회사의 시드니 지사에서 교육을 받고자 이곳에 약 3개월 머무를 계획으로 호주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머물던 숙소 근처 사진관에 필름 현상을 하러 갔는데, 그곳이 마침 한국 교민이 운영하던 곳이었답니다.
가까운 한인 교회를 사진관 주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분이 알려주신 교회가 마침 제가 다니는 교회였습니다.

 

그녀가 처음 저희 교회에 왔던 날, 앞좌석에 앉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심 새로 온 저 여자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 하던 제가 생각이 납니다.
그날 다른 청년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참 차분하고 자신감에 차 보이는 여자라는 첫인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주위 사람들에게 향하는 그녀의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참 괜찮은 여자다라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예정보다 더 일찍 시드니를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겨지기도 하였습니다.

 

그후로 이-멜과 전화로 간간히 소식을 주고 받으며 지내다가 얼마후 제가 한국에 갈 기회가 생겨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년말 즈음의 추운 날씨와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두번씩이나 반갑게 만나준 그녀가 무척 고마웠습니다.
당시 헤어질 때에도 여전히 이유 모를 아쉬움이 느껴지곤 하였습니다.
저의 한국 방문 이후 그녀는 시드니를 두어 차례 다시 찾아올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한 벽이 스스럼 없이 무너지게 됨을 느꼈습니다.
매번 헤어질때마다 느껴지는 아쉬움 또한 계속 되었습니다.

 

짧은 삶의 여정 속에서 짝사랑도 해 보았고, 짝사랑의 대상도 되어 봤습니다.
사랑이라고 믿어보고 싶었던 이성과의 사귐, 그리고 헤어짐도 경험해 봤습니다.
사랑이라는 실체를 알고 싶었고, 이루어보고 싶었을 때 그녀는 조용하게 다가왔고, 어느 순간 저 역시 그녀에게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서로 더 다가오라고 손짓 한적도 없었고, 다가가라고 뒤에서 미는 자도 없었지만, 어느새 그녀와 나는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이루어졌습니다.

 

떳떳하게 무엇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었고, 내세우기는 커녕 살포시 보여줄만한 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부족한 나를 한없이 신뢰했습니다.
그녀에게 나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먼저 나를 믿어줬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믿어준다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리고 헤어질때의 그 아쉬움이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져서, 지금은 부족하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나은 남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녀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함께 키워 나가기 위해서 그녀와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뢰 위에 쌓아 나가는, 완성해 나가는 사랑의 첫걸음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6월에 그 첫걸음을 디딘후 이제 겨우 몇발자국 걸었을 뿐인데, 뒤 돌아보니 행복한 기억들이 참 많습니다.
분명 앞에 놓여진 길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옆에서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이제는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녀의 눈을 보니 미소 짓고 자신 있게 앞으로 또 한발 걷게 됩니다.
아마 앞으로 가게 되면서 서로 다른 풍경들을 바라보며, 서로가 못보던 것들을 관찰하면서 갈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서로에게 정겹게 이야기하면서 가다 보면, 결국은 한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군요.
남은 여정이 벌써 설레여집니다. ^^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