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낙서

야외 극장

CKChoi 2001. 2. 5. 20:53


대학 시절에는 꽤나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주말이나 틈이 날 때 자주 극장에 갔었습니다.
한 때는 하도 많은 영화들을 보아서 친구들하고 영화를 보기라도 한다면,
“저거? 나 봤어. 그거? 그것도 봤어. 저 영화? 저것도 봤어.”
이런 대답이 잘 나와서 제가 보지 않은 영화 다 함께 보는 것이 힘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는 블록 바스터 (blockbuster) 영화는 커녕 선전에서 마음에 드는 영화
조차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Shakespeare in love, American Pie, Gladiator, Mission Impossible 2…
보지 못한 영화들 열거하는 것이 본 영화들 열거하는 것보다 더 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참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가 바로 “American Beauty”라는 영화였습니다.
대중적으로 인기도 많아서 상도 많이 받은 영화였지만, 탄탄한 시나리오로 한마디로 무척
재미있는 영화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정작 극장에서 할 떄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게으름 떨고 싶은 주말을 잡아서 비디오로 봐야 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극장에서 보는 영화보다 더 큰 스크린에서 그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바로 야외 극장 형식으로 4주간 매일 밤 다른 영화들을 상영해 주는 축제가 시드니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일명 “Open Air Cinema”라고 하는데, 이 야외 극장이 열리는 장소가 참 명소입니다.

저의 데이트 장소(?)로 자주 가던 Mrs. Macquarie’s Chair라는 곳입니다.
약 200년 전에 호주의 3대 총독이었던 Macquarie 총독이 고향을 그리워 하는 부인을 위해
시드니 항구가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그녀가 앉아서 향수병을 달래줄 수 있게 의자를 만들은
곳이라 그 지명이 그렇게 불립니다.

뒤에는 초록 정원이 있으며, 바로 앞에는 바다, 그 뒤로시드니의 명물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한 눈에 보이며, 그 뒤로는 시내 건물들이 보이는 곳입니다.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장소이기도 한데, 아늑한 정경 때문에 연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영화였고, 그러한 배경에서 영화 관람을 하고 싶은 충동도 일어서
일반 극장표보다 비싼 야외 극장 표를 2매 구입했습니다.
애인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다른 외간(?)여자와 그런 장소는 갈 형편이 되지 못해서
제일 안전한(?) 제 여동생과 함께 가기로 하였지요.

형제라고는 여동생 하나라서, 게다가 겨우 한 학년 아래이기 때문에 저희 남매 지간은
시드니에서 거의 전설(?)로 통할 정도로 금실(?) 좋은 남매 지간입니다.
애인 사이로 오해 받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기에 그러한 말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지요.
그런데 요즘은 각자 사회인이다 보니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드물어서 좋은 계기라
생각을 하여 제 동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녀 또한 받아 들였습니다.

함께 영화 보기로 한 날 거의 정시에 퇴근을 하여 시내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야외 극장이 열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시드니의 여름 해는 무척 길기 때문에 저녁 7시가 훨씬 넘었어도 밝았습니다.
영화 상영은 8시 30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7시 30분 쯤 도착하였는데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엇습니다.
축제 기간 중 임시로 세워 놓은 객석 중 나름대로 명소라 생각되어지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제가 바(bar)에 가서 백포도주(white wine) 한 잔 씩을 사왔습니다.
정말 연인처럼 와인 잔으로 건배하고 한 모금씩 마시면서 영화 시작을 기다렸습니다.

땅꺼미가 지고 시원한 여름의 바닷 바람이 귓 속을 스쳐 지나 가며,
주위의 시내 건물들의 불빛이 점점 선명해 지기 시작할 때 눕혀져 있던 대형 화면이
“웅~~~” 소리를 내면서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영화를 봐야 할지, 아니면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해야 할지 약간 갈등이
일면서 영화 관람을 하였습니다.
중간 중간에 심심찮게 들리는 철썩 거리는 파도 소리와 와인 한잔을 음미하면서…

탁 막힌 실내가 아니라 자연 바람을 맡으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별빛의 은은한 조명과
창호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기분을 주는 오페라 하우스의 얌전한 조명이 한데
어울린 곳에서 볼 수 있어서 너무 인상적인 영화로 남게 된 American Beauty…

주인공인 Kevin Spacey가 자신의 아르바이트를 과감히 그만두는 한 청년을 보며
영웅이라고 부르며 부러워 하는 모습에 저도 어느 순간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후에 Kevin Spacey가 자신의 직장을 그만 두고 자유 분방한 삶을 살아갈 때도 전 그의
픽션(fiction)의 모습을 너무나 부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은 홈비디오를 찍기 좋아하는 청년이 자신이 촬영한
것 중 제일 아름다운 것이라 하며 소개하는 비닐 봉지 날라가는 장면…
보잘 것 없는 비닐 봉지가 바람에 휘날리며 여러 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
땅 위로 떨어 졌다가 공중 위로 붕- 솟아 오르다가 벽에 부딪히는 약간 처절한 모습…
왠지 어울리게 않게 약간의 숙연함 까지 느껴지게 하였습니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저 비닐 봉지의 모습이 요즘 내 삶에서 자주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생명체로부터 그러한 동료(?) 의식을 받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커다란 여운을 남기고 그 영화는 마쳤습니다.
삶은 가지고 있을 때 풍요롭게 누려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고 군중의 틈에 끼어
아름다운 정경을 뒤로 한채 떠났습니다.
아쉬움인지, 영화를 통해 되짚어 본 나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누려본
삶의 풍요를 놓치기 싫어서인지, 작은 한숨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래- 삶은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생과 작별할 때는 영화의 주인공이 삶과 작별하기 전 자신의 눈 앞을
스쳤던 순간들 – 들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일, 외동딸의 다양한 모습들,
자신의 아내의 미소 – 보다 더 많은 삶의 순간들이 내 눈 앞을 스쳐 지나가게 하고 싶다.

이 짧은 삶을 행복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사진 설명: 그 당시의 모습을 담은 화보를 스캔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