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낙서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

CKChoi 2000. 8. 10. 10:17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


나는 오늘
내 앞에서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을 보았다.

소란스러운 주변 틈 사이에 낀
그들의 침묵의 대화는
나를 끌어 들이기에 충분했다.

얼굴 표정도 지어가며
빠른 손짓으로
입술도 움직여가며
들리지 않는 말을 하는
그들의 대화는
주위의 시끄러운 음성들보다
더 힘 있어 보였다
아니,
그들의 수화로 대화하는 모습이
주위의 음성들을 시끄럽게 들리게 했나 보다.

간혹 그들은 재미 있다는 듯이
소리 나지 않는 큰 웃음을 지었으며
손으로 책상을 살짝 치며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백인과 동양인
젊은이와 주름살 낀 얼굴
남자와 여자
그들이 수화로 대화할 땐
모두 평등하게 보였고
서로의 의사를 매우 존중히 들어주는 것 같았다.

나의 대화는 어떠한가 생각해 본다
대화가 아니라 소리 나는 음성일 뿐일 때가 많고
성의 없이 내뱉는 말들이 많아
한마디 한마디
정성스레 온 몸으로 대화하는
수화하는 이들의 모습에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한다.

큰 목소리만이 들리는 것 같은 오늘 날
작은 소리라도
적은 말이라도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처럼
성의 있게 온 몸으로 하고 싶어진다.


- 1998년 가을에 최창권 –


얼마 전 방을 정리하는 중, 한 낯익은 공책을 발견하였습니다.
펼쳐 보니 제가 2년 전 쯤에 간간히 낙서를 하곤 했던 노트였습니다.
제가 끄적 거린 글들도 있었고, 어디선가 읽은 시 몇 편을 옮겨 적은 것도 있었습니다.

윗 글이 정확히 언제 쓴 것인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그 공책에 적힌 바로 앞의 글과 뒷 글에는 날짜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98년 4월과 7월 사이, 즉 98년 시드니의 가을 말이나 겨울 초에 쓴 것 같습니다.
글 아래에 적힌 제 자신의 기록을 보니 제가 그 당시에 아르바이트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감회가 새로워 지더군요.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그 때와, 윗 글을 쓰게 된 배경이 새롭게 상기 되었습니다.

98년 초에 대학을 한학기만 남겨 두고 있었고, 과목도 아마 한 두개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이틀 정도 밖에 나가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찾았습니다.
때마침 교민 변호사 사무실에서 직원을 채용하는 광고를 보아 신청했는데 운 좋게 되었습니다.

호주에서는 집을 사고 팔 때 변호사를 통해서 합니다.
계약서를 서로 주고 받는 것은 Exchange of Contracts, 최종적으로 수표를 주고 받는 절차를 Settlement라 하는데, 제 주 업무는 그 두 가지의 일을 저희 사무실 대리인으로 참석하여 상대편 변호사 대리인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시내의 Land Titles Office (LTO) 라는 곳에 가서 손님이 사고 싶은 주거 공간에 대한 여러 서류들을 얻을 수 있는데, 그 LTO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루는 예전과 같이 LTO의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데, 제 앞에서 조금 떨어진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5-6명의 일행이 눈에 띄었습니다.
각기 다른 연령층이자 호주의 다문화 사회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여러 인종들이 섞인 테이블이었습니다.
그들은 청각 장애자들이었는지 모두 수화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화로 대화하는 모습에 전 마력처럼 이상한 끌림을 느껴 점심 내내 그들을 보았습니다.
주위에서 더 시끄럽게 대화하는 이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밖에 관심이 가지 않더군요.
마치 동굴 끝에 한 줄기 빛만 보이듯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에 안 들어오고 그 테이블만 유난히 크게 보이고 더 밝게 보였습니다.

수화로 대화한다고 해서 재미가 없던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정상인이 폭소를 터트릴 때와 마찬가지로 몸을 뒤로 젖히면서, 책상을 치면서 웃었습니다.

다만 웃음 소리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맑은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전 그날 점심 내내 그들을 보면서 마음속에 무엇이 와 닿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명이 수화로 대화할 때 다른 이들은 모두 집중해서 진지하게 그를 봅니다.
나는 과연 누가 나에게 이야기할 때 그 사람에게 그만큼 관심을 주는가?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은 사소한 이야기 일지도 모르나 온 몸을 다해서 정성스레 설명합니다.

얼굴 표정도 풍부하게 지어 가면서, 말은 안 하지만 입술을 움직이며 자신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정성스레 전달합니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대화할 때 그만큼 정성을 쏟으면서 이야기 하는가?

사람들은 제각기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들은 정상인들이 봤을 때는 좀 안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지만, 그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며 대화를 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혀를 자유롭게 놀릴 수 있고 말을 할 줄 안다는 축복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냥 무심코 내뱉는 말들은 얼마나 많은지?
그냥 건성으로 듣는 말들은 또 얼마나 더 많은지?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최고라고 이 세상은 우리들을 착각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적은 말이라도, 작은 목소리라도, 진솔하고 정성스레 해야 겠다는 생각을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을 보고 생각해 봤습니다.
소리가 나는 말들 중 잘못 말하여 자칫 소음 공해로 밖에 전락되어 지는 것들은 참 많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꼭 성대로 소리를 내어서 하는 말보다, 나의 진실된 행동과 따뜻한 눈빛이 건네주는 말들이 더 필요하고, 그러한 것들을 더 원하는 내 주위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오늘 다시 한번 살펴 보게 되는군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그림 설명: 짧은 말을 건네기 위해서도 수화로 정성스레 이야기하는 이들의 모습을 우리의 대화 속에서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